노동조합/사회를 보는 눈

노동자의 이름으로 - 양봉수열사 평전

터사랑1 2018. 7. 19. 22:57

노동자의 이름으로

6월 25일 서영호양봉수 열사정신계승사업회 김대식 집행위원장으로부터 양봉수열사의 평전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고 바로 책을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이미 울산에서는 북콘서트까지 끝낸 상황이더군요.

책은 500페이지가 넘었지만 신국판 크기였기에 빨리 읽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처럼 되지가 않더군요. 이미 읽어려고 사 놓은 다른 책도 있었고, 이런저런 일들이 겹치고 등등

그래서 절반은 조금 넘겨서 읽은 것을 확인하고, 7월 17일 국회에서 열리는 기자회견에 참석하는 차 안에서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권하게 되었습니다. 


양봉수열사의 책에 관심이 있는 것은, 제가 작으나마 몸과 마음을 보탰던 싸움이었기 때문입니다. 



95년 늦봄 초여름의 기억

94년 12월에 제대를 했습니다. 매우 늦게 군대를 갔다 온 것이지요.

앞으로의 진로에 대한 고민을 하던 차에 선배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울산 현대자동차에 일하는 노동자 한명이 분신을 했는데, 계명대 동산병원에 와 있다는 겁니다. 위독하다는 것과 함께 경찰이 환자를 빼 돌릴 수 있기때문에 병원에서 함께 투쟁을 할 사람들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연락이 되는 선후배들과 함께 동산병원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동산병원에서 낮에는 현대자동차를 규탄하는 소규모 결의대회를 이어가고, 밤에는 혹시나 있을 지 모르는 경찰의 침탈에 대비해서 규찰을 서는 것으로 투쟁을 이어갔습니다. 


대구에서 바라보는 울산은 도시규모는 적었지만,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 등 대규모 노동조합의 힘을 확인할 수 있는 도시였습니다. 89년 현대중공업 투쟁 당시에는 만세대 아파트 인근에서 지원투쟁을 하기도 했었으니까요. 그에 비하면 대구에 노동운동은 적은 규모의 제조업 노동조합과 병원등 공공부문으로 조직되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현대자동차는 제조업 사업장 중 가장 큰 규모의 노동조합이 있었는데, 정작 양봉수열사의 투쟁에 결합하는 노동자의 숫자는 적었습니다. 


울산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은 당시 전국적으로 '어용'으로 알려진 사업장이었습니다. 

양봉수열사도 신차투입과정에 최소한의 합의도 되지 않은 속에 회사가 작업을 강행하는 것을 막으려고 라인르 정지시켜서 해고가 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현대자동차 노동조합에서는 '사전에 노동조합에 허가를 받지 않고 진행된 투쟁'이라며 해고자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열사가 분신한 날도 소위원회 발대식에 참가하기 위해 정문을 통과하려 했지만, 경비들이 폭력을 동원해 막으면서 스스로 몸을 불사른것이지요.


<양봉수열사의 분신이후 조합원들은 어용노조를 규탄하는 투쟁을 자연스럽게 이어갔다고 합니다.

사진출처 ;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


<96년 현대자동차 임단투 사진. 사진출처 ; 한내>


회사의 억압적 노무정책에 맞서 싸우다 해고된 노동자를 노동조합이 해고자가 아니라 '면직자'로 부르면서, 분신 이후에 대해서도 손놓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니 계명대 동산병원에 올 수 있는 현대자동차 조합원은 스스로 휴가를 사용하거나 교대조를 이용해서 그도 아니면 휴일에 올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특히, 당시에 현대자동차 선거를 앞두고 있어서 공장안을 챙겨야 하니 더더욱 사람이 적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한달 이상을 대구지역 노동자들과 소식을 듣고 연대하러 온 학생 및 시민들의 힘으로 투쟁을 이어갑니다. 그렇게 힘을 모았던 동지들은 '양봉수열사의 쾌유와 안전은 대구가 지킬터니, 이번에 제대로 민주노조를 세우라'는 의지를 보여 준 것이지요. 그도 그럴것이 지금도 5월과 6월은 많은 사업장에서 '한해농사'라는 표현을 써 가면서, 교섭에 집중하는 시기이지요. 당시 대구지역 많은 노동조합이 자기 사업장의 임단협도 중요하지만, 열사를 지켜내리라는 의지가 강했던 것 같습니다. 


시신탈취, 그리고

6월 13일 아침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양봉수열사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고 급하게 병원으로 달려 갔습니다. 최근에도 삼성전자서비스 염호석열사의 시신이 경찰에 의해 탈취된 적이 있는데, 그 당시에도 경찰이 열사들의 시신을 탈취해서 화장을 해 버리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죠. 병원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열사의 시신을 대구화장장으로 옮겼다고 들었습니다. (제 기억에는 경찰에 의해 탈취를 당해서, 저희가 각자 택시등을 통해서 화장장으로 따라 갔던 것 같은데, 책에서는 유족 및 대책위와 망월묘역에 안치한다는 협의속에 화장장으로 간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가 대책위 핵심은 아니었으니, 책의 기록이 맞겠지요)


대구화장장에 도착했을 때에도 큰 숫자가 되지 않았습니다. 40여명 정도 되었던 것 같습니다. 

화장장에서 경찰과 대치하면서 한참을 대기하고 있다가, '경찰이 열사의 유골을 빼돌린다'는 소리가 들리면서 한바탕 몸싸움이 크게 벌어졌습니다. 우리는 40여명 밖에 되지 않았고 경찰은 400명도 넘었고 정말 있는 힘껏 싸웠지만, 유골을 탈취 당하고야 말았습니다. 


얼마나 싸웠는지 '배고플 때 먹어라'며 후배에게서 받아놨던 초코파이가 가방안에서 떡이 되어 있더만요. ㅠㅠ


그렇게 유골을 탈취당하고, 경찰과의 몸싸움에도 몸이 엉망이 되어서 한쪽편에 앉아 있는데 담배가 한개피씩 이어져 왔습니다. 제가 군대에서 상병 때 담배를 끊어서 '군기가 빠졌다'는 소리를 듣고 살았는데, 그렇게 다시 담배를 피우게 되더군요.


그리고 20년이 넘었습니다. 

그해 치뤄진 현대자동차 노동조합 선거에서 이른바 '민주파'가 압승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과연 양봉수열사의 염원하던 노동조합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적어도 현대자동차 민주노조 20년 역사에 '양봉수'라는 이름 석자를 빼 놓은 수 없을 것입니다. 

알아야 할 것도 있지요. 당시 전노협이 끊임없이 탄압받던 그 어려운 조건속에서 규모도 적었던 대구지역 노동자들이 양봉수열사를 지켜내기 위한 노력이 이어졌고, 그것이 바로 연대임을.


책을 통해 알게 된 것

현대자동차 또다른 열사 서영호열사에 대해서는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책을 통해서 알게되었습니다. 제대로 된 노동조합을 지켜내는 과정에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눈물과 삶이 포함되어 있음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정재성이라는 선배 노동자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현대자동차노동조합이 87년 대투쟁을 시작으로 민주노조를 자리잡는 과정을 조금이나마 알게 된 것같습니다. 


책에서 공개된 실명은 3명?

작가 이인휘씨는 이 책에서 서영호, 양봉수, 정재성 세명의 열사만이 실명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한 명 더 있더군요. 읽어보시면 알게 되실겁니다. 

꼭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양봉수열사 약력 -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동연구소에서 가져 왔습니다. 


1967년 4월 전남 무안 출생

1986년 2월 목포 덕인고 졸업 
1990년 10월 현대 자동차 입사(의장 2부)
1991년 소위원활동, 저시급 동지회 2공장 대표
1992년 2월 성과분배투쟁 관련으로 해고 
1993년 1월 원직 복직
1994년 의장2부 소위원회 부의장, 8대 대의원 당선
1995년 2월 의장2부 마르샤 투입관련 회사측의 합의사항 불이행에 맞서 라인정지 건으로 두번째 해고
1995년 5월 12일 공동소위원연합 2기 출범식 참석을 위해 정문 진입 시 경비들의 폭력적인 저지에 항거하며 본관정문 앞에서 분신
1995년 6월 13일 대구 동산병원에서 31일간 사투끝에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