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조합/S&T

16년만에 동지들을 모십니다.

터사랑1 2009. 5. 3. 23:50

S&T중공업지회(구 통일중공업지회, 지회장 성영길, 이하 지회)는 마창지역 민주노조운동의 상징으로 통합니다.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지역의 중요한 투쟁마다 그 선두에는 S&T중공업지회가 있었습니다. 부도가 나고, 매각등의 과정을 거쳐왔고 조합원들의 평균나이는 50에 가깝지만 임금수준은 지역에서 낮은 편입니다.


지회에는 두 명의 열사가 있습니다. 이영일열사과 림종호열사가 그들입니다.


“원혼이라도 악질관리자놈들과 싸우겠다!"

이영일열사는 1990년 5월 3일 오전 8시 (당시 (주)통일) 1공장 식당 2층 옥상에서 온몸에 신나를 붓고 불을 붙인 뒤 6미터 아래로 투신했습니다. 전신 3도 80분의 화상을 입고, 투신 중 머리에 받은 충격으로 뇌수술을 앞두고 10시 45분경 운명했습니다.

5월 3일은 현대중공업노동조합의 투쟁에 공권력을 투입한 것에 항의하는 연대총파업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열사가 생존당시 이 세상 노동자들에게 외친 것은 "군부 독재 타도! 노동 탄압 중지! 회사는 각성하라!" 의 세마디 구호였습니다.

열사는 "죽어서도 통일자본과 싸우겠다. 날 화장하여 회사에 뿌려달라. 원혼이라도 악질관리자놈들과 싸우겠다!"는 유서를 남겼습니다.

효성이 남달랐던 이영일 열사는 7년 동안 투병중이던 어머니를 형사들이 찾아와 “자식이 노동운동을 하고 있으니, 그만 두게 하라”고 협박했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괴로와 하면서도, 다른 한편, 노조탄압을 자행하는 더러운 수법에 분노하다 분신에 이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개인주의에 대해서는 가을낙엽 쓸어버리듯, 적에 대해서는 엄동설한처럼 냉혹하게”

림종호열사는 1990년 1차 구속돼 1년 6개월 만기로 석방됐습니다. 1992년 노태우 정권의 총액임금 분쇄 투쟁으로 2차 구속되어 재판을 받는 도중 수갑을 풀어주지 않는데 대해 항의했고, 당시 재판부는 “잠깐 하면 된다.”며서 그대로 재판을 강행했습니다. 마침 손에서 저절로 빠져나온 수갑을 그대로 재판장에게 던짐으로서 법정모독죄가 추가되어 3년형 을 더 선고 받게 되었습니다.

법을 지켜야할 재판부가 스스로 불법과 편법을 노동자에게 강요하면서 고분고분하게 순종하는 노예로 길들이려 하자 이에 노동자의 자존심으로 당당하게 맞섰던 열사께서는 1993년 9월18일 진주교도소에서 “의문 사(死)” 의 싸늘한 한 마디 말없는 주검으로 돌아왔습니다.

지회는 열사의 죽음이후 교도소 측의 관리 소홀에 대한 책임을 묻는 소송을 통해 승소하고 “故림종호열사의 원혼”을 조금이나마 달랠 수 있었습니다. 

림종호동지는 옥중편지를 통해

“동지에 대해서는 봄날처럼 따사롭고, 투쟁에 대해서는 여름날처럼 뜨겁고,

개인주의에 대해서는 가을바람이 낙엽 쓸어버리듯 하고,

적에 대해서는 엄동설한 처럼 냉혹해야…… ”

한다는 노동조합 간부들과 활동가들의 올바른 자세를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http://tongiltu.cafe24.com ‘열사방’ 참조)


해마다 추모제 진행, 추모비 준비

지회는 해마다 이영일열사의 기일인 5월 3일을 기점으로 추모제를 진행해 왔습니다. 2008년에는 교육시간을 활용해서 추모제를 했다고, 회사가 참석한 조합원들과 간부들에 대한 징계를 하기도 했습니다.
지회는 민주노조를 지키기위해 노력했던 두 열사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추모제 외에 추모비를 건립하기 위한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 회사와 협의를 시작했습니다.


‘노조사무실 앞만 아니면 된다’ ‘회사안에는 안된다’

2003년 새롭게 경영진으로 당시 삼영의 최평규자본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전문 경영인이라며 한때 대우자동차 노동조합에서 핵심적인 활동가로 일해왔던 사람들이 함께 들어왔습니다. 지회는 새로운 경영진과 함께 추모비 건립과 관련한 협의를 했습니다. ‘노동조합이 있는 건물 앞은 안된다’는 정도로 회사와 협의를 했습니다. 이렇게 정리가 되는 듯 했으나, 다른 현안들이 겹치면서 실행으로 옮겨지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회사는 ‘회사안에는 안 된다.’며 입장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5년이 지났습니다.

 

16년만의 추모비 제막식

림종호열사가 사망한 지 16년만에, 추모비를 제작한 지 5년만인 2009년 5월 3일.

지회는 양산 솥발산에 추모비를 세웠습니다. 제막식에는 열사들의 가족과 지회 조합원, 문성현 전 위원장을 비롯한 퇴직자들, 그리고 부산경남울산열사정신계승사업회, 지역의 간부등 100여명이 참석했습니다.

제막식은 민중의례와 내외빈소개에 이어 이영일열사와 함께 활동했던 윤정민 전 지회장의 열사약력 소개, 제막식으로 이어졌습니다. 이영일열사 추모곡을 함께 부르고, 성영길지회장과 열사가족들의 인사, 그리고 많은 분들의 추모사, 민족무예단 ‘고구려’ 소속의 강상석씨의 바라춤과 문성현 전 위원장의 인사말이 이어졌습니다. 문 전위원장은 인사말에서 “20년전 우리가 노동조합을 처음 만들고 투쟁하던 때의 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그들과 함께 하는 투쟁의 공간이 있다면 80이 되더라도 그 자리에 함께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어 두 열사를 기리는 추모시 낭독과 참석자들의 헌화로 1시간여에 걸친 추모제는 마무리 됐습니다.

참가자들은 노동조합의 힘이 약화되고 그에 따라 추모비를 회사안에 세우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 하며, 한편으로는 악질 S&T자본에 맞서 민주노조를 지켜나가기 위한 노력을 다하겠다는 결의를 다지며 추모제를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