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가는 모습/걷는 사람들

시인 권환을 만나다!!

터사랑1 2010. 7. 24. 13:45

<지난 6월 20일 ‘걷는 사람들 http://cafe.daum.net/mswalke ’는 제7회 권환문학제 ‘문학길 걷기’ 행사와 함께 마산시 진전면 오서리 일대를 걸었습니다. 한 달여 지났지만,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

 

 

 

경행재를 향해서

6월 20일, 오전 11시가 조금넘어 ‘걷는 사람들’과 함께하기 위해서 경남대 앞으로 갔습니다. 큰딸과 함께 가면서 진해에서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11시를 넘길 것 같아서 차를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정작 버스는 11시 40분경이나 되어야 온다고 합니다. 미리 메일을 통해서 일정을 보내주는데, 장소만 확인하는 바람에 제대로 챙기지를 못했네요.

11시 40분경 76번 버스를 타고 오서리를 향했습니다. 진전면 사무소에 12시가 조금 넘어 도착해서, 곧장 ‘경행재’를 향해서 갔습니다.

 

경행재(景行齋)

마산시 진전면 오서리에 위치한 경행재는 본래 안동권씨문중의 회계서원의 지원으로 1867년 3월에 건립된 건물이다. 건립초기에는 문중의 재실 겸 한학의 서숙으로 사용되었으나 일제의 강점이 시작된 1910년부터는 사립 경행학교의 교사로 사용되었다.

권환 시인의 부친인 권오봉 선생이 설립한 경행학교는 이 지역 신교육의 전당이었을 뿐 아니라 민족운동의 요람이었다. 권환 시인을 비롯하여 상해임시정부에 활동하다 순국한 죽헌 이교재선생과 기미년 삼진만세의거의 주역이었던 백당 권영조의사 등이 이곳에서 수학하였다.

1927년 일제에 의한 공립보통학교 신설로 폐교 당한 이후에는 지역 행사나 강습장, 회의장 등 지역의 문화시설로 이용되어 왔다. 처음 지어졌던 건물은 4칸 반 규모에 들보 3량, 우물마루를 갖춘 팔작지붕 건물이었는데, 1988년 보수공사를 하면서 누마루가 증축되었다. 1985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권환 시인의 생가터를 찾아서 

 

 

경행재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이곳에서 참가자들은 점심을 해결하고, 오후1시경 송창우님과 권환 시인의 5촌 조카되시는 분으로부터 경행재와 권환시인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받고 생가터를 찾아갑니다.

경행재에서 나와 왼편으로 오서리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을 걸어가다가 ‘안동권씨 세거지’라는 표지석을 지나 오른편 골목길을 따라가면 ‘오서리 동대마을 여성경로당’이 나옵니다. 여성 경로당 옆 골목길(진사골목이라 한다네요)을 따라 들어가 권환 시인의 생가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권환 시인의 생가터

마산시 진전면 오서리 565번지는 권환 시인의 생가가 자리했던 곳이다. 아직까지도 진사골목이라 불리는 오래된 골목길 옆에 지금은 집터의 일부만 남아 텃밭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디딜방앗간으로 사용되던 자리에 낡은 건물이 한 채 서 있고, 터의 가운데 자리잡은 한 그루의 감나무와 한 귀퉁이 오래된 우물만이 시인의 생가터를 쓸쓸히 지키고 있다.  

 

 

 

 

아직 빨래터가 있네
권환선생의 생가터에서 다시 돌아나와 오서저수지(탑동 저수지)를 돌아오려고 길을 재촉합니다. 그런데 얼마가지 않아서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 곳이 있습니다. 도심지에서는 볼 수 없는 곳, 빨래터가 있습니다.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는 흔적도 있습니다.

빨래터를 지나, 확 트인 길을 따라서 걷다가 14번 국도를 횡단해서 탑동 마을로 들어갑니다.

 

 

 

 

 

이길이 아닌가벼?

회동마을, 탑동 마을을 끼고 있는 오서저수지(탑동 저수지)는 제법 커 보입니다. 그리고 둑 보강공사를 하는 것이 보였습니다. 이 둑 보강공사가 우리 앞길을 막았습니다. 공사로 인해 길이 막혀서, 갔던 길을 되돌아 와야만 했습니다. ‘이 길이 아닌가벼?’를 되뇌이며.

 

보광산 유택

다시 14번 국도를 횡단해서 오서리 옆 보광산 자락에 있는 권환 선생의 유택을 찾았습니다. 유택에서 절을 하고, 참가자들은 준비해온 떡과 막걸리 등으로 요기를 한 뒤 다시 발걸음을 재촉합니다.

 

 

권환 시인의 유택

권환 시인의 유택은 생가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보광산 자락에 있다. 안동권씨문중의 납골당 뒤편에 작은 봉분이 둘 나란히 앉았는데, 한 기는 권환시인의 묘고 다른 한 기는 시인의 아내인 조성남의 묘다.

 

 

 

 

 

월안교와 용대미를 지나서

오서리 들판을 지나서 진전중학교 옆 길을 따라서 진전천을 만나러 갑니다. 어서리와 곡안리를 연결해 주는 월안교와 만만년 세월의 지층을 켜켜이 쌓아올린 바위 절벽 용대미를 옆으로 해서 곡안리 마을 숲으로 갑니다.

 

 

환상적인 숲속 음악회를 뒤로 하고

진전천을 넘어 들어선 곡안 마을 숲, 이런 멋진 숲이 있나 싶을 정도입니다. 이곳에서 제7회 권환문학제 행사의 하나인 ‘마을 숲 음악회’가 열렸습니다. 원래는 3시에 시작하기로 했지만, 걸으면서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해서 30분 정도 늦게 시작해야 했습니다.

주남 저수지 인근에 살고 계신다는 진효근님의 ‘톱 연주’와 박영운, 하동임, 김산 등 지역 가수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멋진 기회였습니다. (이날 공연내용을 보시려면 ‘걷는 사람들 http://cafe.daum.net/mswalke ’ 까페의 자유게시판을 찾아주세요)

 

아쉬움을 뒤로하고

숲속 음악회를 마치고, ‘걷는 사람들’은 곡안리 골목길을 함께 걸었습니다. 정말 오래된 집이 많고, 한국전쟁 당시 총탄 자국도 있는 등 조상들의 숨결과 시대의 아픔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멋진 마을이었는데 아쉽게 배터리가 부족해서 사진으로 담지를 못하고, 집으로 발길을 옮겨야만 했습니다.

 

 

시인 권환(1903 - 1954)

보광산 자락 이곳에는 한국 계급문학의 중심에서 겨레사랑응ㄹ 올곧게 실천한 시인 권환(본명 권경완)이 반려 조성남 여사와 함께 잠들어 있다. 시인은 1903년 경남 마산시 진전면 오서리에서 태어났다. 마을 경행학교에서 배운 뒤 1919년 서울로 올라가 중등학고, 휘문고보를 마쳤다. 1924년 일본 산형고교를 거쳐, 1926년 경도제국대학 독문과에 입학하였다.

시인은 1924년 『조선문단』12월호에 단편소설 「아즈매의 사(死)」를 실으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 뒤 ‘신소년’ ‘별나라’ ‘조선지광’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시·소설·아동문학·평론·희곡에 걸쳐 다채로운 문학 활동을 펼쳤다. 일찌감치 겨레문학의 방향에 대해 고심했던 시인은 경도제국대를 졸업한 1929년부터 카프동경지부에 들어가 본격적인 조직 활동을 벌였다.

같은 해 귀국하여 중외일보 기자로 몸을 담고, 카프 중앙위원 기술부 책임을 맡아 계급문학의 2차 방향전환을 앞에서 이끌었다. 소장파의 핵심 맹원으로서 창작과 이론, 조직 활동에서 열성을 다했다. 시인은 1934년 신건설사 사건으로 말미암은 카프 2차 검거 때 왜로에서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35년 카프 해체 뒤 지병인 결핵 탓으로 옥에서 나와 요양생활에 들어섰다.

시인은 을유광복을 맞이하여 조선문학가동맹 제2대 서기장으로서 다시 열정적인 문학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병고가 더욱 깊어져 1948년부터 고향 마산에 머물며 오랜 병마와 싸웠다. 온 나라가 비에 젖은 1954년 7월 30일 시인은 완월동에서 가난과 병마에 꺾이고 말았다. 낸 시집으로 『카프 시인집』(1931)․『자화상』(1943)․『倫理』(1944)․『凍結』(1946)이 있다.

나라 잃은 시대의 깜깜한 어둠 속에서 몸과 마음을 다해 겨레문학의 불꽃을 피워내고 스스로 그 불꽃으로 깨끗하게 돌아간 사람이 권환이다. 시인을 기리는 제1회 권환문학제를 맞이하여 이 자리에 유택 표지석을 세운다.

2004년 5월 22일

 

<권환 선생의 유택에 있는 표지석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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