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가는 모습/이곳 저곳

모란공원을 아시나요?

터사랑1 2009. 11. 10. 00:38

88년부터 시작한 노동자대회

87년 전국에서 수많은 노동조합이 건설됐습니다. 민주노조 건설 후 노동조합은 87년 12월 마창노련을 시작으로 지역조직을 건설했습니다. 그리고 지역조직 건설은 전국조직 건설로 이어졌고, 한국전쟁 이후 최초라는 ‘전태일열사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가 88년 11월 연세대노천강당의 전야제와 집회, 그리고 여의도까지 이어지는 끝없는 행진을 시작으로 해마다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전국노동자대회의 기원’http://blog.daum.net/pnn518/11295907, 또는 노동자역사 한내 http://www.hannae.org/ 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저도 88년부터 거의 해마다 노동자대회를 전야제부터 참여를 해 왔습니다.


모란공원을 가다!!

전태일 열사(전태일 열사를 잘 모르시는 분은 http://www.juntaeil.org 에서)를 추모하는 대회이긴 하지만 수도권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핑계와 이유로 사실 열사가 누워있는 모란공원에는 제대로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2002년 전국노동자대회 때부터 해마다 모란공원을 다녀오고 있습니다.

모란공원에 가서 수많은 열사를 만나며 일종의 부채의식을 안고 오고,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활동을 해 오곤 했습니다.

올해 다시 모란공원을 갔습니다. 서울 도심에서는 줄잡아 1시간 정도가 걸리는 거리에 있는 남양주시 모란공원. 우리는 인근에서 민박집을 잡아서 자고 아침에 모란공원으로 갔습니다.

8일 일요일 비가 내리는 속에 마창지역금속지회 조합원들과 함께 모란공원을 찾았습니다. 해마다 노동자대회에서 모란공원을 찾는 이가 줄어들어 안타까웠는데, 올해는 비가 와서 그런지 아예 참배객이 없더군요.

 

 

모란공원 입구에서 100여미터도 들어오지 않아서 우측편으로 민족민주열사 희생자 묘역도가 우리를 맞이합니다. 문익환, 계훈제, 박래전 등 모란공원에 약100여명의 민족민주열사가 잠들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줍니다. 묘역도를 지나 올라가면 모란공원 민주열사추모비가 다시 우리를 맞이합니다.  

그렇게 모란공원에 누워 있는 수많은 열사를 만나게 됩니다.


전태일, 그리고 조영래

 

 

우리는 해마다 전태일열사 묘역을 들러 참배를 합니다. 그리고 머리띠를 바꿔 주곤 했습니다.

올해는 비가 오기도 했고, 최근에 머리띠가 바뀐 것으로 보여 바꿔주지는 않았습니다.

전태일열사 묘역을 참배하고 나면 모란공원에 있는 다른 열사 묘역을 참배하고 합니다.

올해는 비가 와서 많은 열사들의 묘역을 돌아보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故 조영래 변호사의 묘역을 다시 찾았습니다. 2002년 제가 모란공원을 처음 왔을때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는 묘역이기 때문입니다. 전태일 열사에 비해 조영래변호사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전태일 열사가 우리 노동운동에 끼친 영향만큼 조영래 변호사가 미친 영향도 크다고 봅니다. 전태일 열사의 삶이, 전태일 열사의 정신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었던 것은 열사의 삶을 책으로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읽도록 할 수 있었기 때문이고, 그 일을 조영래 변호사가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조영래변호사를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전태일 열사를 알게 한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곧 전태일평전을 썼던 사람으로, 그리고 변호사가 되어 누구도 변호하지 않으려던 수재민들과, 철거민들을 변호하던 사람. 그리고 ‘부천서 성고문 사건’을 변호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정도만 해도 딴에는 어깨에 힘깨나 준다는 사람들보다 더 열심히, 더 치열하게 살았음에도 조영래변호사는 40대 초반인 1990년 11월에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자신으로 인해 다시 살아났던 ‘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 전태일 평전’의 저자로 자신의 이름이 올라온 것도 보지 못하고 말입니다.


그보다 저를 더욱 숙연하게 하는 것은 그의 묘역입니다.

모란공원에서 전태일열사 묘역을 가려면 ‘故 조영래 변호사’ 묘역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 그 묘역에는 그 흔한 ‘약력’ 한 줄 없습니다. 비석에는 조영래변호사의 묘라고 표현하는 ‘ 趙英來之墓’라는 다섯 글자 외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운동을 ‘버려가는 과정’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지 못합니다.

제 딴에는 뭔가 큰일을 하는 것처럼 하면서 결국 자신의 문제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온 몸으로, 죽어서까지 실천하고 있는 조영래 변호사가 살아 있는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화두는 ‘버려라’는 것이겠지요.

 

 

13일(금) 11시에 마석 모란공원에서 전태일열사 39주기 추모제가 열릴 것입니다.

그 때 모란공원을 가신다면 전태일열사만이 아니라 조영래 변호사도 만나고 오시기 바랍니다.

전태일 열사의 일기를 올립니다.

저를, 그리고 우리를 뒤돌아보고자.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와했던가?

지금, 이 시각,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오늘은 토요일.

8월 둘째 토요일.

내 마음에 결단을 내린 이날.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 때에

한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 전태일 열사의 1970년 8월 9일 일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