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가는 모습/백두산기행

2015 백두산 평화감성여행 - 여순감옥 (1)

터사랑1 2015. 8. 23. 18:36

2015년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경남지부 / 부산지부 / 경기지부가 주최하고,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여행사업단 [더하기 휴]에서 주관한 '2015 백두산 북중접경지역(대련-여순-단동-백두산-용정-연길-훈춘-도문) 평화감성여행을 다녀왔습니다.

5년전에도 큰딸과 비슷한 코스를 다녀왔고, 이번에는 작은 딸과 함께 다녀왔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늦게 올리네요.

 

 

7월 25일 오후2시경 식당에서 버스를 타고 여순감옥으로 향했습니다. 약 15분만에 여순감옥에 도착했습니다.

 

우리에겐 여순감옥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중국 현지인들은 '여순일아감옥'으로 부릅니다.

 

여순일아감옥은 1902년 러시아가 짓기 시작해서 19042월에 러일전쟁이 시작되면서 85실만 짓고 중단했으며 전쟁 시 잠시 야전병원과 군대병영 장소로도 쓰였다고 합니다.

 

일본군이 여순을 점령 후 감옥이 작다고 생각해 러시아가 지은 기초상에서 253칸으로 증축했으며 동북지대에서 제일 큰 감옥으로 변했습니다. 감옥 주위에는 높이 4m, 길리 725m의 호백 벽돌로 싼 담이 있으며 점유 면적이 26,000(평 단위로 환산하면 7,800여평이 됩니다. 교도소나 구치소의 크기가 확인된 자료가 별로 없지만, 현재와 비교하면 그렇게 큰 면적은 아닙니다. 요즘처럼 재소자에 대한 체육활동보장이 얼마나 되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이 되어서 2,000여명의 죄수를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감옥은 인체실험 의혹이 제기되었으며, 2층으로 된 사형실 뒤편 야산에 묻힌 사형수의 수를 헤아리기 어려웠다고 합니다.

 

수감된 죄수의 다수는 정치범, 사상범과 경제사범이며 일본사람과 한국사람도 있었는데 그중에서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안중근 의사입니다.

 

안중근의사는 19091026일 조선통감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 기차역에서 격살했으며, 체포 후 여순감옥에 갇혔고, 사형을 당했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32세였으며 사형당시 조선민족 복장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기개를 보여주었고, 그것이 격변기의 동북아정세에서 일본에 대항하는 중국인들의 행동과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겠다고 노력해 온 일본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그 외에도 민중혁명을 역설한 민족사학자의 시초 신채호선생과 이회영선생도 여순감옥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회영 선생은 서울 종로땅에서 제법 부자로 살다가 6형제가 동시에 중국으로 망명을 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현재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표인 이종걸의원의 할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신채호선생과 이회영선생은 1920년대후반부터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만들어 함께 활동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교도소 내에는 중국어와 한국어, 그리고 영어로 된 안내판이 부착되어 있으며, 안중근의사 관련 특별관을 마련해 놓기도 했습니다.

 

 

 

<여순일아감옥 전경입니다. >

<입장을 하고 있습니다. 입장료가 얼마였는지는 사진에 남아있지가 않네요. 감옥에서 주로 흰색으로 보이는 시설은 러시아가 만든 공간이고, 붉은색은 일본이 만든 공간입니다.>

 

<입구에서 만난 머리글입니다. 여순일아감옥은 20세기초 러시아와 일본이 중국 여순에 건립한 감옥으로 우리 애국동포와 항일지사를 수감하고 처형한 파시사트 감옥이다. 이러한 감옥의 역사는 근대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략한 축소판이다. 역사를 제대로 기억하려는 노력이 보입니다. 중국어와 한국어, 그리고 영어로 된 설명판이 이어집니다.>

 

<검신실이라고 합니다. 감옥에 들어오는 모든 수형자들은 이 검신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들어가야 했다고 합니다.>

 

<좁은 방에서 여러명의 수형자들이 살은 흔적>

 

<감옥규칙을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로 붙여 놓았습니다.>

<작업규정이라고 합니다. 양발에 커다란 쇠구슬을 차고 일을 했다고 합니다.>

 

<고문실 모습입니다.>

 

<감옥에서 사용된 물품이라고 합니다. 당시 생활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

 

<교회실이라는 이름의 종교공관입니다. 일본승려 2명이 상주하면서 수형자들의 사상현황에 대한 점검등을 했다고 합니다. 대외적으로는 인권(?)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겠죠?>

 

<감옥 곳곳에 이러한 간판들이 걸려있습니다. 당시 수형자들이 쓴 글을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하네요.>